착한 사마리아인의 어떤 문제


(트위터에 올린 글을 정리해서 작성 중. 비슷비슷한 인용 트윗이 많아 하나의 글로 정리 중이다.)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는 엉뚱한 문제가 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찾아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이다(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조건은 편의상 앞으로 생략할 것이다) . 그렇다면 누가 이웃인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다음과 같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이것이 잘 알려진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다. 좋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 사랑을 베푼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인이고, 그의 이웃은 강도당한 사람이다.

예수의 엉뚱한 질문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질문은 엉뚱하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앞서 정리한 것과 달리 예수는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다. 율법교사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즉, “너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이 너의 이웃”이다. 그러면 이 문장을 원래의 율법에 넣어보자. “(너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을 사랑하라”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보편적이다. 그런데 위의 해석된 율법은 지극히 제한적이어서 나한테 잘 해준 사람에게만 잘해주면 된다는 이기적인 주장이 된다. 강도 당한 사람이 깨어나면 그에게 잘해준 사마리아인만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강도 당한 사람은 이웃이 아닌 사제와 레위인은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더 나아가 이웃의 후보에 오르지 못한 여관 주인이나 강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일반적인 해석과 맞지 않는 결론이다.

예수의 사랑을 보편적으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이 맞다면, 예수의 질문은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예수의 질문이 논리적으로 옳다면 일반적인 해석이 틀리고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통해 이기적인 사랑을 주장한 사람이 된다.

여기에 대해 나는 일반적인 해석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성경은 구술문화가 지배하던 시대에 쓰여진 글이다. 구술문화의 특징에 대해서는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또는 알렉산데르 루리아의 1930년대 우즈베키스탄 농민에 대한 연구를 참고하라. 책을 읽기 싫다면 시골 보건소에서 의사가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어요?”라고 묻는데, 50년전 이 마을로 시집 온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할머니를 생각하시면 쉽다. 구술문화에서는 현대와 같이 형식적으로 딱딱 맞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형식적인 논리는 따지지 말고 그냥 대충 좋게 좋게 알아들으면 된다.

그런데 (아마도 기독교인인 것 같은) 어떤 분들은 이런 대충 대충의 독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반론1. 이웃은 상호적이다

첫번째 반론은 다음과 같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다. 이웃은 상호적이므로, 강도당한 사람 또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그와 이웃의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이다. 이웃이 상호적 관계라는 주장에 따르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네 이웃”이다. 이걸 율법에 넣어보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로 동어반복다. 당연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둘제로, 이것이 더 문제인데 그렇다면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 그러면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도 구하지 않은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아니다. 이웃은 상호적이므로 강도 당한 사람도 그들의 이웃이 아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어긴 적이 없다. 그들은 이웃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원래의 율법을 지켰으므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가 사제와 레위인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두 번째 문제는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예수는 아마도 사제와 레위인을 비판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문제는 문제가 된다.

반론2. 누구나 이웃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다시 재반론이 있다. 반론 1에 따르면 내가 사랑만 하면, 상대방은 내 이웃이 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내가 사랑하기에 따라 이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를 이웃으로 만들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게 진짜 예수가 지적하고자 하는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도 이 글에서의 율법, 즉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다. 예수는 여기에 한 가지 추가 율법(“모든 사람을 사랑해서 네 이웃으로 만들어라”)을 도입한 것다. 그런데 사제와 레위인이 이 추가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추가 율법을 어겼다는 것은 강도당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정의상 강도당한 사람은 여전히 이웃이 아니다. 여전히 반론 1에 대한 답과 마찬가지로 이웃이 아니면 사랑을 하지 않아도 원래의 율법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에는 위배되지 않고 역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반론3. 조세호는 왜 안재욱 결혼식에 가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또다른 반론은 사랑하면 이웃이 되고, 이웃이 되면 사랑해야 하므로 어쨌든 두 말은 엎어치나 메치나여서 후자를 어기면 전자도 어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반론은 그래도 말이라도 되지만 좀 일반적인 해석과 다른 결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될 뿐이라면, 여기서부터는 아예 말 자체가 성립하질 않는다. 어느 예능 프로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김흥국: 너 이번에… 너 그, 너 안재욱 결혼 때 왜 안 왔어? 조세호: 누구요? 김흥국: 안재욱이. 결혼 때. 조세호: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

“지인의 결혼식에는 가야한다”라는 율법이 있다고 해보자. 모르는 사이라도 결혼식에 가서 축하를 건네면 같은 연예인이니 서로 얼굴 정도는 알 것이고 그러면 지인 정도는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추가 율법으로 “결혼식에 가면 지인이 된다”를 만들어보자. 그러면 두 율법이 같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조세호가 안재욱 결혼식에 가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이런 반론을 제기하신 분들은 예수를 김흥국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응용하면 정말 괴상한 주장들을 만들 수 있다. 간단하다. “R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L이라는 행동을 해라”나는 문장 1과 “L의 행동을 하면 R의 관계가 된다”라는 문장 2를 만든 다음에 “L의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 문장 1을 위반했다고 결론내면 된다. 사마리아인의 경우에는 R=이웃, L=사랑이다. 조세호의 경우에는 R=지인, L=결혼식 참석이다.

그러면 R=주인, L=복종이라고 해보자. “주인의 말에 복종을 해야 한다”가 율법이라고 하자. 그리고 당연하지만 “누군가에게 복종하면 그 사람이 주인이다”. 자 이제 여러분은 개처럼 짖으면서 나에게 주인님이라고 외쳐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주인의 말에 복종하지 않은 것이다. 이 결론이 옳은가?

기타 다른 독법을 제안하는 반론들

그 외에 다른 독법을 제안하는 반론들이 있으나, 역시 말이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건 의미론의 영역이라 님이 반복하는 기초적인 순수형식 논리로 포착이 안되는 것”: 언어학의 의미론에서하는 일 중에 하나가 문장의 의미를 형식논리로서 분석하는 것이다. (참고: MIT 대학원 “고급 의미론” 강의 계획서) 이 반론은 의미론의 영역이 의미론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의미론의 영역이 의미론의 영역이 아닐 수는 없다. 기각.

“예수의 말과 비유는 모두 모순적이며, 따라서 변증법적 운동을 반드시 염두해가며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유대 미드라시 전통처럼요.”: 유대교 독법에 따르면 신약은 성경이 아니고, 기독교는 유대교의 이단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유대 전통을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기각.

반론 4. 예수는 이웃을 정의하지 않았다

예수가 이웃을 정의한 것이라는 반론과 달리, 이번에는 예수는 이웃을 정의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 상황에만 국한되는 질문이지, 이웃에 대한 일반적 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앞에서와 같은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것대로 또 문제가 있다. 우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의 정의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사랑하더라도 이웃이 아닐 수 있다”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서는)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율법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율법을 떠나 그냥 파렴치한 주장이다. 예수가 이렇게 파렴치한 주장을 했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런 결론까지 내리지 않더라도 “이웃이 누군인가?”라는 질문에는 당연히 누군가는 이웃이고, 누군가는 이웃이 아니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율법 교사가 이웃을 “사랑을 베푼 사람”으로 이웃을 한정했을 때도 예수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즉, 이 비유에 이웃에 대한 정의가 포함되지 않는다 해도 이웃은 누군가로 한정될 수 있는 관계이고 따라서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임의의 기준으로 한정된(단, 그 기준은 여기서 정하지 않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라”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가 진실로 하려는 말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반론 5. 이웃의 정의가 포함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앞의 4에서 이어지는 반론으로 이웃의 정의가 포함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는 그 차원을 넘어서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반론도 있다.

그런데 우선 정의는 포함되어 있거나, 있지 않다. 이것이 논리학의 배중률이다. 중요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이 비유의 원문이 그리스어로 쓰여졌는지, 라틴어로 쓰여졌는지는 이 논의에서 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대답은 할 수 있다(참고로,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그리고 어차피 어느 쪽인지 중요하지도 않은데 이웃에 대한 정의가 포함되어 있어도 문제고(예수의 엉뚱한 질문과 반론 1, 2, 3), 포함되어 있지 않아도 문제(반론 4)이기 때문에 그 차원을 뛰어넘든 말든 어차피 모든 경우에 문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답을 하지 않아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